1) 병자호란의 발발 후금은 정묘호란 후에도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군량과 병선을 요구하는 등의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또한 인조 10년(1632)에 후금의 태종은 내몽고를 평정한 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자신을 황제로 칭하여 이전의 형제 관계가 아닌 군신 관계로의 대우를 조선에 요구했다. 인조 14년(1636)에 청 태종은 용골대, 마태부 등을 보내어 여러 제후들이 태종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에서도 이렇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이러한 청의 요구에 대하여 성리학적인 면에서의 주화론이 양분되어 논란을 벌이다가 척화론을 택해 청나라 사신을 인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아 들이지 않았다. 물론 조선에서도 최명길 같은 주화론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세는 척화론 쪽으로 기울어졌으며, 드디어 8도에 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하고 적의를 보였다. 이에 청 태종은 조선의 이러한 도전적인 태도에 조선 원정군을 조직하여 침략준비를 서둘렀다. 청 태종은 드디어 12월 2일 만주, 몽고, 한인으로 조직된 10만 대군을 친히 거느리고 심양을 출발, 9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였다. 본래 병자호란 당시 서북로의 방어상태는 정묘호란 중에 받은 타격이 커 거의 포기상태였다. 1632년 청의 군신의 예를 거절한 이후부터는 청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임경업을 청북방어사로 삼아 군사력을 강화시키고 김자점을 도원수로 삼아 서북로 전체의 방어력을 재점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짧은 시일에 효과적인 방법으로 산성방어체제에 착수하여 백마산성이나 자모산성, 그리고 정방산성, 장수산성 등을 각각 보수하고 주 병력을 이곳에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이러한 전략을 이미 간파한 청군은 주 병력이 있는 산성을 일체 외면하고 도성으로 진격하여 서울 근교로 직진하였다. 조정에서는 이같은 사실을 바로 그 전일에야 접하고, 급히 주화론자인 최명길 등을 전진에 보내 시간을 얻는 한편, 두 왕자 즉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종실과 관료들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시키며, 인조는 소현세자와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이때 여러 군영의 군사들과 모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수성태세를 갖추었는데, 훈련도감군은 동성 망월대를, 총융군이 성 남쪽을, 어영군이 성 북쪽을, 수어군이 성 서쪽을 방비하였다. 그러나 각 영은 군사의 동원이 온전치 못하여 입성 군사가 총 1만 2천여명에 불과했고 군량미 또한 수송의 문제로 한 달 분량도 없는 처지였다. 즉 청의 기습침략으로 그 동안의 군비 확장이 쓸모없게 되었으며 또한 산성을 지원해야 할 각도의 지방군도 내원중 곳곳에서 패하여 산성의 형세는 그야말로 고립상태를 이루었다. 형세가 이에 이르자 성안에서는 강화론이 대두되었고 주전, 주화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더이상 지탱할 수가 없어 여론은 주화론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리하여 1월 10일 이후 최명길 등이 여러 차에 걸쳐 청군과 화평교섭을 진행하였는데 청 태종의 요구는 조선왕이 친히 성문 밖에 나와 항복하고, 양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인도하면 화의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 인조는 처음 이를 주저하였으나 강화도 함락 소식에 접하자 부득이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三田渡.松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례를 올리게 되었다. 이 결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 조선은 청에 대하여 신의 예를 행할 것. 조선은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과 교통을 끊고, 명에서 받은 고명(誥命), 책인(冊印)을 헌납할 것. 조선은 왕의 왕자와 제2자, 그리고 대신의 자녀를 인질로 보낼 것. 청국이 명을 정벌할 때는 기일을 어기지 않고 원군을 파견할 것. 내외 제신과 혼인을 맺고 화의를 굳게 할 것. 성곽의 증축, 수리는 사전에 허락을 받을 것. 황금(黃金) 100냥, 백은(白銀) 1000냥을 비롯한 20여종의 물품을 세폐로 바칠 것. 성절(聖節), 정삭(正朔), 동지(冬至), 경조(慶弔)의 사신은 명나라의 구례를 따를 것. 단도(椴島)를 공격할 때는 병선 50척을 보낼 것. 포도(逋逃)를 숨기지 말 것.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할 것. 등이었다. 굴욕적인 화의의 성립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삼학사는 참형을 당하였으며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생활을 하였다. 그 후 인조 17년(1639) 청은 조선에 강요하여 청태종 송덕비를 삼전도에 세우게 하였으며 이로서 조선은 청에 복속하게 되었다. 두 차례의 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서북지방은 황폐해졌고 소중화로써의 자존심 또한 실추되어 청에 대한 적개심만 더욱 고조되었다. 물론 정부내에서는 김자점을 중심으로 한 친청파의 우세와 그 횡포가 매우 심했지만, 반면 반청 세력이 그 보루를 면면히 지켜 인조에 뒤이어 즉위한 효종에 의해 맥이 유지되었다. 즉 효종은 친청파의 예상을 뒤엎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등 반청세력을 대거 등용하였으며 오랜 심양의 억류생활에서 겪은 고초를 잊지 않고 북벌을 국시로 삼아 반청의 태도를 분명히 했던것이다. 이러한 효종의 북벌계획은 때마침 그동안 조선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여오던 도르콘(예친왕)이 죽고 그 일당이 모두 역모죄로 제거되는 등 청 정부의 정세변화를 맞아 그 활로를 찾게 되었다. 더욱이 친정에 나선 청 세조는 조선에 대한 종래의 강경책을 버렸고, 조선 정부에서도 북벌세력의 규탄을 받아 위축되던 김자점 세력이 효종 2년 그 아들 김익의 역모죄가 드러나면서 완전히 제거되자 효종은 청의 태도의 완화를 틈타 서북로를 제외한 전역의 군비 확장을 추진하였으며 영장제를 부활하고 남도 각지의 산성을 수축하여 그동안 악화된 중앙 군영의 강화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1654년 청이 나선정벌에 포수동원을 요청하자 이에 응하여 서북로의 군비 재건도 양성시켰다. 한편 병자호란 후 반청운동이 격렬했던 조선이지만 그 후 18세기 후반에는 오히려 청의 발달된 문화를 수용하자는 북학론이 대두되는 대청에 대한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고 이러한 생각이 지나쳐 청에 대한 종속 관계는 대한제국이 성립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계속- 삼충각과 마애비 <저작권자 ⓒ 새화순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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